말이라는 결과물

2023년 01월 29일

이야기 하나.

K는 잡지사 에디터였다. 그는 정확히 인터뷰 약속 시간 5분 전에 내가 있는 사무실로 도착했다. 안경을 썼고, 긴 머리에 나이아가라 파마를 먹였다. 사진사 없이 혼자 온 그는, 카메라를 한쪽 어깨에 매고 있었다.

“ 포토그래퍼가 시간이 안 맞아서. 제가 이따 인터뷰 끝나고 찍을게요. 일하시는 거 찍어도 괜찮으시죠?”

그는 질문지를 힐끔거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연스러움,능숙함,세심함,날카로움. K는 괜찮은 직업인이었다. 자신이 궁금한 길로 나를 데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데 능숙했다. 그 점이 나를 조금 안심하게 했다. 몇 번의 인터뷰에서 불쾌하게 인용되는 경험을 하고 난 뒤였다. 인터뷰를 ‘당할 때’ 경계하는 지점들이 생겼다.

이 사람은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고 있을까? 나에 대한 편견이 있지는 않나? 의도를 곡해하지 않을까? 인터뷰의 대상이 된 나는 때로 인터뷰 하는 사람들을 평가했다. 나는 주의 깊게 그들을 관찰했다. 인터뷰를 할 때는 상대가 녹음을 요청하면, 나도 함께 녹음을 했다. 괜찮으시다면, 저도 이후에 들어볼 수 있게 녹음을 하겠습니다. 말이 좀 서툴까 걱정이 돼서요.’라고 말하면 흔쾌히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날 K와의 인터뷰도 서로의 녹음기를 켜놓고 진행했다.

며칠 뒤 K의 메일이 도착했다. 1차 원고도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원고를 열어본 나는 당황했다. 미묘하게 내가 한 것 같지 않은 말들로 말이 교정되어 있었다. 문장은 매끄러웠고, 주어와 술어가 잘 맞았으나 이건 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의아함에 살짝 속이 들끓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말을 했단 말인가? 마침 그날 녹음한 파일이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재생을 눌렀다.

네, 제가 그 말하셨던 거에는 질문이 어떻게 보면 처음에 답한 거랑 연결이 되는데요. 그 뭐냐면 제 생각에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면서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러니까 공동체를 만들고 그 목적을 가진 공동체가 움직이게 되는데…

뭐라는 건가. 나는 말을 잘 하는 편이랬는데. 그런데 인터뷰의 녹음본에는 옮겨 적었을 때 온전한 글, 문장이 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다. 그 후 나는 자괴감에 빠졌다. 나는 온전한 문장이 되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이구나. ‘이그저’와 ‘어떻게 보면,뭐냐면,그러니까’를 삼십번쯤 말하는구나.

이걸 일명 ‘가비지 랭귀지(garbage launguage)’라고 부른다. 스피치를 가르치는 곳에서는 누군가의 3분 발표 동안 ‘이그저’를 세어보라는 숙제를 낸다고 한다. 그 후 나는 남의 말 속에서 ‘이그저’를 뽑아내며 남는 노트 귀퉁이에 바를 정자를 그리는 습관이 생겼다. 몇 번이나 저 사람은 ‘가비지 랭귀지’를 넣는지. 고약한 놀이인데, 깨달은 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쓰레기(?)처럼 말한다. 그대로 문장으로 받아적을 수 있는 말을 완성하는 사람은 드물다. 훈련 받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말한다. 혹은 말이 적거나, 자기 말을 자주 받아 적어본 사람은 좀 더 낫다.

이야기 둘.

나는 말을 잘 하는 사람도, 말을 잘 못하는 사람도 아주 많이 만났다. 인터뷰를 당하는 입장이기도 했지만 인터뷰를 하는 입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을 못 한다는 건 다양한 의미를 담는다.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생생함을 좀 살려서, 영상으로 최근 이슈에 대한 당사자의 목소리를 담자며 코너를 하나 만들었다. 그 코너에서는 영상 통화 화면을 녹화해서 직접 통화가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을 내고자 했다. 주제는 65세 장애 노인들의 지원금 박탈에 대한 이야기였다.

65세를 기점으로 국가에서 활동 지원사를 보내주는 시간이 대폭 줄어드는 새로운 정책 방향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65세를 넘어가면 장애 노인을 노인으로 분류해서 활동 지원 시간을 하루 4시간으로 축소하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장애인이고 노인인데 65세를 넘어가니 그냥 노인으로 치겠다는 거였다. 절박한 이들이 많았다. 당장 거동도 어렵고, 밥을 굶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법은 이후 개정 됐다.)

이 정책의 당사자인 장애 노인 여럿의 이야기를 담고자 했는데, 그중 반신을 못쓰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그 분의 인터뷰를 두고 피디가 고민이 깊었다. 결국 같이 옆에 의자를 깔고 앉아 영상을 보았는데, 그냥 둘 다 같이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말이 ‘힘들어요, 죽고 싶어요, 괴로워요.’의 반복이었다. 옆에서 간병을 하는 중년 여성이 그 말을 한 번 더 풀어서 전했다. 문제는 그 말도 알아 듣기가 힘들었다. 억양이 섞인 한국말에 추임새들이 끼어서 알아 듣기가 힘들 뿐더러,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이야기도 보태져서 이야기가 무썰듯 잘리지가 않았다. 누구의 언어도 사회에 딱 들어맞게 통역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모든 말은 결국 걸러지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위해 말하지만, 그 연결이 얼마나 인위적인지, 이미 만들어진 연결에 의존하는 일인지 의식하지 못한다. 결국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포기한다. 이미 강하게 서로 연결 되어 있는 것에 접붙이는 이야기 방식이 가장 적게 오해를 산다. 그러나 오해를 적게 사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생각하면, 사실 크게 오해받기를 감수하는 게 더 진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러나 진실에 가깝지만 전해지지 않는 이야기란 어떻게 의미를 찾을까? 깨어진 말과 글들이 모인 공간을 우리는 예술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노래하듯, 고함 치듯 소리를 던지는 이야기들도 이야기로서 소용이 있다. 대부분은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를 우연히 듣고 말해지지 않은, 적히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다는 걸 알아차리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세상이 숨긴 비밀처럼. 암호처럼. 어떤 존재는 분명히 알아 차린다.

오해를 적게 사기 위해 포기한 것들을 생각하면, 사실 크게 오해받기를 감수하는 게 더 진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끝.

하마 글방에서 썼습니다. 4주 차 글감 ‘책이 침묵하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