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와 강아지

2023년 03월 03일

거북이가 창틀을 기어간다

프랑스의 빈집에서 거북이가 창틀을 기어간다. 한국에선 유기된 크림색 푸들이 주인을 기다린다. 이 두 가지 장면이 연결되어 떨어지지 않는다. 침대에 누웠다가 결국 다시 일어났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잘 수가 없다. 글자들을 털어내기 위해 앉는다. 많이 읽고 글자에 체해서 토하기 위해 잠이 깨는. 그런 밤이다.

첫 번째 장면은 아니 에르노의 책에서 왔다.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가 있는 시설로 찾아간다. 책 제목인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쓴 문장이다. 어머니는 치매에 걸렸다. 인간의 존엄은 무엇일까. 나아지나 싶었던 병세는 오락가락하며 가족들을 피 말린다. 결국 어머니가 다시 시설로 가던 날, 어머니는 그 외출이 긴 산책일 줄로만 알고 길을 나섰다. 엄마, 아니요, 이제 집에 안 와요. 그때 갔던 곳 말고 다른 시설로 가실 거예요. 어머니의 당황을 작가는 알아차린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집을 떠나던 날, ‘어머니는 뭔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사람처럼 자꾸만 집을 되돌아' 봤었다.

그 집에는 거북이가 있었다. 그가 되돌아본 건 그 집에 두고 온 거북이였다.

시간이 흐른다. 어머니는 이내 잠잠해진다. 시설에 갈 때마다 작가는 기록한다. 간병인은 ‘당신 어머니가 또 아무 데나 오줌을 쌌다'고 화를 낸다. 오랜만에 방문한 그녀에게 어머니는 혼잣말로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마카롱을 부순다. 관심을 갈구하는 심술이다. 그조차 잠잠해진다. 어머니는 이제  ‘아무것도 쳐다보지 않는다.’

_어머니는 이젠 개인 소지품을 몽땅 잃어버리고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모두 포기해버린 것이다. 어머니가 우리 집에 있을 때 화장도구 세트를 찾아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애쓰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사물들에 집착함으로써 세상에 매달려 있고자 고군분투한 것이었다. (...) 어머니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손목시계도 화장수마저도 없어지고 지금 갖고 있는 것이라곤 먹을 것밖에 없다.

아니 에르노,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p39_

병원에서 어머니는 아래쪽 틀니를 잃어버린다. 간병하는 여자는 말한다. “틀니가 없어도 상관없어요. 어머니께서는 유동식만 드시니까요."(p79.) 다음 달엔 위쪽 틀니도 잃어버린다.  이제 어머니에겐 위아래 틀니가 모두 없다. 나는 작가와 그 병실에 함께 선다. 간호사의 상관 없다는 말이 귀에 들어온다. 무엇이 상관없다는 거지? 그 말에서 무언가 다시 떨어져 나가는 감각을 느낀다. 계속 떨어져 나가는 의미들. 무의미로 얼굴을 뒤바꾸는 의미를 부여해온 순간들. 나도 알아. 사실 우리는 물이야. 우리는 단백질이야. 화장터에 앉아있는 망연함. 한 줌이 되는 인생을 목격하고, 남은 사람들은 남은 날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유품이 되기 전에 유실물이 된다

나는 쓸모도 의미도 알 수 없는 물건들이 계속해서 올라오는 당근마켓을 생각한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물건을 내놓고 누군가는 그 물건을 가져간다. 피드를 새로고침하며 물건들의 밀려옴, 쓸려나감을 구경한다. 누군가는 삶을 정리하는 중이다. 누군가는 삶을 채우는 중이다. 그런 감각에서 삶을 정리하는 사람들의 물건을 상상하며 나는 신경이 곤두선다.

어제는 신문의 한구석에 위치한 토막 기사를 봤다. 작은 강아지 사진이 인쇄되어 있다. 누리꾼 와글와글, 이런 취지의 작은 코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버려진 한 강아지의 감동 사연이라고 적혀있었다.

경기도 동두천에 길을 배회하던 강아지가 있었다. 멀끔한 크림색 푸들. 목줄도 하고 있었다. 며칠을 돌아다니니 보다못한  강아지 유치원 직원이 개를 데려왔다. 목줄에 메인 쪽지를 펴보니 나이 든 점잖은 글씨가 적혀있다. “똑똑하고 영리한 우리 장군이 발견하신 분 잘 좀 키워주세요” "단둘이 살다가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읍니다. 저는 정부가 운영하는 시설로 갑니다." 사정을 설명하는 글 말미에는 편지가 있다. 장군아. 어디 에 있든 네 옆에 있을게. 잘 지내라. 안녕. 아프지 말아라. 아빠가.

나는 가만히 서 있어도 위치가 이동하는 무빙워크에 탑승한 감각을 상상한다. 거꾸로 움직이는 무빙워크. 나아가는 게 아니라 밀려나는, 몸이 뒤로 휘청이고 소실점에서 멀어지는 감각. 사람들은 서서 밀려난다. 가장자리는 계속 넓어지고 넓어진 가장자리에 자꾸 무언가 쌓인다. 그 더미 안에 잃어버린 틀니도, 크림색 푸들도, 거북이도. 이건 사람을 상실한 자리에 남은 유품이 아니다. 유품이 되기도 전에 유실물이 되는 것들. 그 유실물의 목록이 길어진다.

사람들이 시설에 가고 그곳에서 죽는다. 친구는 할머니의 죽음에 분노했다. 요양원에서 가래에 질식해서 돌아가셨는데, 간호사가  밤중에 호흡 호스를 잘 처치하지 못했다. 목에 상처가 많았다며 그는 이건 의료사고라고 했다. 코로나 속에 가족들은 조용히 장례를 치렀고 그 애는 ‘의료 사고'라고, 조문객들은 ‘호상'이라고 했다. 몇 년 뒤 다른 친구의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밤중에 가래 때문에 숨을 쉬지 못해 돌아가셨다. 또 몇 년 뒤 다른 친구의 할아버지가 가래 때문에 질식해 돌아가셨다. 우리는 가래 때문에 죽는 걸까. 가래 때문일까.

그러니까 이건 예기치 못한 사고인가. 아니면 경로 위에 있었던 사건인가.

글자가 괴롭다.

사람들은 서서 밀려난다. 가장자리는 계속 넓어지고 넓어진 가장자리에 자꾸 무언가 쌓인다. 그 더미 안에 잃어버린 틀니도, 크림색 푸들도, 거북이도. 이건 사람을 상실한 자리에 남은 유품이 아니다. 유품이 되기도 전에 유실물이 되는 것들. 그 유실물의 목록이 길어진다.

집은 누가 지키노?

30년 간 시어머니 밥만 차리던 어머니. 어느 날에 갈등이 폭발하고 그는 그 일에서 벗어난다. 이후 딸 집에 가서 살겠다며 시어머니는 선물한 안마 침대까지 악착같이 가져간다. 시어머니에겐 어쩌다 보니 평생 말할 사람도 만질 사람도 며느리뿐이었다. 그는 딸집에서 울면서 전화를 건다. 여기가 감옥소다, 갈 데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 나 혼자 여기 있다. “재영 엄마야, 집은 누가 지키노? 내가 가서 지켜야 안 되겠나?” 어머니는 그 질문이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뜻인 줄을 알면서 애써 대답을 않는다. 시어머니는 치매에 걸리고 며느리를 잊었다. 올케언니, 올케언니 하며 며느리를 따른다. 언니 집에는 누가 살아요? 그럼 집에는 누가 있나? 그럼 내가 가서 집 봐줄까? 나 언니 집에 가도 돼?―

―하재영 작가,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p189

나는 이 글자들이 너무 괴롭다.

머리카락은 존엄일까? 어떨 땐 그럴 수도. 시설에서 30년을 살았던 허혁 씨는 탈시설 후 이제는 사회에서 일을 하고 외출을 한다. 그는 출근 전 거울을 보며 활동지원사에게 흑채를 뿌려달라고 한다. ‘흰머리까지 있으면 꼴불견이지.’―아무것도 아닌 게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 우리는 산다. 무의미와 의미의 균형을 적절히 맞춰가면서. 인생은 원래 별 의미가 없는 걸지도. 그렇지만 의미를 부여해가면서 산다. 그게 삶이 우리에게 달라붙는 방식이다.

경향신문, 시설 밖은 넘고 또 넘어야 할 장애물 도시 세면을 마친 뒤 새치가 거슬렸는지 활동지원사에게 흑채를 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 계속 버튼을 끈다. 떼낸다. 밀어낸다. 주변화한다. 버린다. 처분한다. 서울지하철도공사 직원은 시위에 참여한 장애인 시민의 전동 휠체어를 껐다.―간단하게 모욕을 준다. 노골적인 폭력보다 더 치가 떨린다. 버튼의 위치를 알고 조용히 버튼을 끄는 그 연결된 동작을 떠올린다. 우리는 움직이는 지각 판 위에 서있다. 떠밀려서 사람들은 가장자리에 선다. 그러나 가장자리에 선 사람이 이제는 너무 많다. 그 균형이 깨지는 지점에서 한번은 이 배를 엎어야 한다.

―비마이너, 경찰은 고의로 전동휠체어 전원을 꺼버리고, 컨트롤러 자체를 부숴버리기도 했다

이 배를 엎어야 한다

나라가 늙는다고 아우성이지만 그건 나쁘지 않다. 연대는 약해진 사회가 공부할 수 있는 가치다. 우리는 바퀴가 다니는 도시에 살게 되거나, 모두가 시설에 고립되는 도시에 살게 될 거다. 자전거,유모차,휠체어,구루마를 끌고 다니는 도시에 살게 되거나, 시민의 태반은 시설에 갇히고 오로지 출근하는 노동자, 쓸모 있어 불려가는 존재만 돌아다니는 도시에 살게 된다. 두 문장은 극단에 있지만 그래야 현실적이다. 둘 중 무언가는 당신의 현실이 된다. 당신은 하나의 동네에만 살 수 있을 것이다. 반지하방이 침수되는 건 모두에게 똑같이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현실에는 계층이 반영 되고 둘 중 무언가가 나의,당신의 현실이 된다.

나의 불만은 이것이다. 사람의 불행이 촘촘이 설계된 나라에서 너무 많은 뉴스가 사람을 논하는 척 한다. 사람이 없다,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이 넘친다, 사람이 무쓸모하다. 어떻게 노인을 지하철에 태울 것인가. 돈도 없는데. 돈을 벌도록 정년을 늘릴까. 바쁜 사람들 출근하는 시간대에만 안 타게 해볼까. 결국 도래하는 ‘대체 무슨 돈으로?’라는 질문. 어떻게 부양할 것인가. 무슨 돈으로 할 건가. 그러려면 사람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어떻게 사람을 더 낳게 할 것인가. 누가 낳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낳을 것인가. 돈을 헛썼나? 돈을 더 줘야 하나? 다시 돈으로 돌아오는 돈 이야기. 다 엎어야 의미 있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내가 앞에서 한 번은 이 배를 엎어야 할 것이라고 했나? 한 번으로는 안 될 것이다. 한 번으로는.

끝.

요즘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 결합해서 괴로움이 커졌다. 밤에 자다 깨서 일기를 썼다. 글방을 경험하며 퇴고 없이 쓰기, 해체적으로 쓰기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었다. 누군가의 이해를 구하는 글과는 다른 종류의 글도 쓰여질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글은 이해를 구하는 글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