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프리즘

2023년 04월 01일

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카밀라 팡이란 작가의 책을 읽었다.

오전엔 침대에서 애인과 사랑스럽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붙잡고 싶은 마음으로 배웅을 하고 혼자 집에서 인스턴트 비빔면을 뜯어 끓여먹었다. 티비를 켜뒀다. 베란다로 바깥을 내다볼 때마다 초록이 짙었다. 면을 끊어먹으며 여러번 고개를 들어 밖을 봤다. 여름 음식에 여름 색. 계절이 바뀐 장면을 실감했다.

주홍색 책을 들고 소파에 앉아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었다. 편한 자세를 찾으려 애썼는데 결국 지금은 활자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노곤하고 편안해 잠이 왔다. 불안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졸려서 잠이 왔다. 소파에 앉아 있다 누워 있다 하다보니 눈이 감겼다. 책을 가슴께에 얹고 눈을 감았다. 낮잠을 좀 잘까. 가물가물 잠과 의식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보니 세찬 빗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국수처럼 곧은 비가 또 오고 있었다. 비 손님이 잦은 여름. 지구가 바뀌나 보다 하고 걱정스런 마음을 품고 다시 졸았다. 기분 좋은 낮잠을 잤다.

‘실현되지 않은 계획에, 이루지 못한 목표에, 실패한 관계에 절망하지 말 것.’

작가가 준 메시지를 여러 번 읽으며 마음이 햇살에 빳빳이 말린 빨랫감처럼 탄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인간’이란 걸 낯설게 느끼며 무엇이 ‘인간의 조건’인지 생각하며 살아왔다면 얼마나 많은 것이 과제였을까. 과제가 많이 주어졌다는 게 그 과제를 풀 자격이 없다는 메시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주어진 조건들이 여의치 않을 때마다 나는 얼마나 내 자격을 의심했나. 자신의 존재를 사과하지 말 것. 수치심을 버릴 것. 있는 그대로 살기로 마음 먹을 것. 그게 우리가 삶이란 실험을 지속할 수 있는 가장 쾌적한 상태임을 기억하자.

두려움과 프리즘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지금의 나에게 유효한 조언이었다. 작가는 두려움 때문에 포기한 자신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암벽 등반도 갯벌 달리기도 그 중 하나였다. 두려움은 사람을 마비시킨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뜯어볼 생각을 하기도 전에 눈이 탈 것 같은 강한 빛처럼 사람을 겁 먹게 한다. 두려움에 프리즘을 비추면 어떨까? 두려움은 일이 잘못 될 것이란 예언이 아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주의력이 고양되었다는 신호다. 그뿐이다. 그럼에도 두려움이 우리를 멈추게 한다면, 그 안에 있는 감정의 파장들을 분리해서 살펴보자고 그는 제안한다. 어떤 파장은 길고 오래 비춘다. 어떤 파장은 짧고 강렬하다.

나는 요즘 좋은 순간들 속에 두려움이 있음을 느꼈다. 어딘가로 나아가려 할 때마다 틱- 소리를 내며 내 앞을 막는 심리적 차단봉을 느낀다. 그러나 내게 두려움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떤 일을 비난하거나, 막연히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꺾는 일 같아 입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 복잡한 두려움이 내가 가장 지금 다루어야 하는 감정이란 걸 알고 있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몰두하고 싶다면 내게는 결국 두려움을 프리즘으로 비춰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트레바리 독서모임에서 선정한 첫번째 책. 더 구석구석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날 쓴 일기는 이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