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을 배우자

2023년 08월 06일

디자인을 더 배워보려 한다. 직업을 전환하려는 결심까진 아니다. (물론 앞일은 모르지만 일단 나는 무엇을 하든 그런 식으로 결심해서 하는 성격이 아니다.) 호기심과 두근거림이 일어나 그 마음을 따라간다.

계획적이지 않은 사람에게도, 나름의 계획하는 방법은 있다. 큰 계획을 세워두면 어그러진다. 그리고 시간표를 지키는 학생처럼 인생을 살고 싶진 않다. 어그러질 것을 염두에 둔 계획, 언제든 모양을 바꿀 수 있는 계획이야말로 나에게 맞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내가 나를 성장시키는 방법은 나를 계속 어떤 환경에 옮겨두는 것이다. 놀이터를 만든다. 긴 호흡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무언가 일어나고 만들어내도록 어떤 영역에서 일어나는 호기심에 스스로를 계속 노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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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콘텐츠 디자인에서 시작했다. 더 잘 전달 되게 할 수 없을까. 더 정확하게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더 적합하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혼자 이것저것 해봤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텍스트를 소비하는 경험 자체를 좋게 할 수 있을까. 블로그 페이지를 혼자 기획해보다가, 어느 책에서 아래 문장을 읽었다.

“시각적 정보를 소비하는 일은 ‘눈의 안무, 움직임(choreography of eye)’과 같다.”

무언가 탁 트이는 느낌이 있었다. 사실 다큐멘터리도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컷(cut)이란 장치로 눈의 안무를 만들어낸다. 거기엔 어떤 규칙들이 있기도 하지만 마음껏 규칙을 깨면서 자신의 것을 만들어갈 수 있다. 재밌군, 하고 눈이 커졌다. 더 이것저것 해보며 마음이 움직이는 모양을 탐색해보기로 했다.

콘텐츠 하나에 대한 설계가 아니라,콘텐츠 전달의 모든 경험으로 생각이 뻗어나갔다. 결국 좋은 이야기는 누가 말하느냐에 영향을 받는다. 브랜드가 어떻게 표현되느냐. 어떤 이미지로 말하느냐. 브랜드, UX writing/design 등의 키워드를 탐색했다. 내가 ‘콘텐츠 전략가의 업무’로 이해하는 걸 해외에서는 콘텐츠 디자이너라고 부르기도 한다. 좀 더 디자인의 기초 자체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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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랑할 만한 일은 무엇일까. 나는 세 가지 레이어를 본다. 첫번째는 그 일을 할 때 나에게 일어나는 일. 재미,흥미,호기심,성취감,경제적 보상,의미. 두번째는 그 일을 할 때 만날 수 있는 업역을 본다. 내가 그 공간에 들어가면 무엇과 연결될 수 있는지. 그 일을 하는 사람들. 그들이 가진 철학. 세계관. 자부심. 역사. 마지막으론 그 일로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걸 본다. 내가 만든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끔찍하지 않도록. 나는 성형외과 비교 어플을 만드는 사업이 혁신이라고 말하는 기만은 저지르고 싶지 않다. 일은 내가 세상을 살아간 흔적을 남긴다.

나는 모르는 걸 알고 싶을 때 책을 본다. 이런 저런 작업을 해보면서 디자인이 나에게 재밌고,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 알고 싶어서, 노트 상단에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제목을 먼저 적었다. 집에 있던 대여섯권의 책을 펼쳐두고 단어를 추출했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추출한 단어들은 몇 가지 뭉치로 분류할 수 있었다.

1. 디자인은 문제 해결 방법이다

문제 정의, 해결 방식, 판단력, 사고 방식, 관점의 전환… 이런 단어들이 빈번하게 나열됐다.

2. 디자인은 질서를 찾는 본능적 즐거움이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간결함과 완전성을 추구한다, 의미있는 질서를 만들어내려는 의식적, 직관적 노력이다, 질서를 찾는 본능적 즐거움이다. 이런 말들을 묶었다.

3. 디자인은 인간의 진정한 요구에 반응하는 일이다

‘그래야 한다’라는 말이 항상 덧붙었다. 그렇지 못한 디자인이 더 많기 때문에 나오는 성찰적 목소리일까? 윤리적 책임이 따르는 일이며, 사회 계획이고,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행하는 것을 포함한다…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목소리들이 있었고, 인간의 ‘요구’라는 말을 소비 욕구로 구체화하는 말들이 있었다.

그와 관련된 단어들은 이렇다.

  • 형태와 질, 아름다운/ 소비자 만족, 안전을 책임진다
  • 사물의 작동과 통제, 행위를 지원한다

4. 디자인은 일상에 있다

좋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5. 디자인은 경험이다.

‘전체적 체험’이란 말에 밑줄을 그었다.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고, 때로 자기 관점을 포기하는 일.

6. 디자인은 상호작용의 본질이다.

기표, 개념 모형이란 단어가 함께 끌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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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텍스트를 가로질러 읽다보니 디자인을 정의할 때 생기는 논쟁 지점이 눈에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디자인을 과학/공학/기술에서 말한다. 또다른 사람들은 디자인을 인문학/예술의 영역에서 말한다. 실제로 제품을 만들어내는 디자인과 언어로서의 디자인은 성격이 많이 다른 것 같다. 자동차를 만드는 디자인과 책을 만드는 디자인은 다르니까. 내가 좀 더 관심 있는 부분은 후자다.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으로서의 디자인.

우연히 이 질문에 힌트가 되는 이야기를 어제 을지로의 디자인 학교에서 들었다.

디자인은 시각 언어다. 언어는 소통을 위해 우리가 발명한 기호다. 언어는 계속 변하고 있다. 어떤 언어를 건넬 것인지 결정하고, 기획해내는 일은 인문학의 영역에 가깝다. 직관/체험/경험/표현. 발표자 선생님은 ‘표현주의’를 말했다. 그런데 언어는 자의적인 게 아니다. 규칙을 따른다. 이미 알아낸 규칙을 배우는 일, 새로운 규칙을 알아내고 실험하는 일 또한 디자인이다. 규칙과 직관을 둘 다 배운다. 너무 재밌는 일 아닌가?

그리고 그 업역에 있는 사람들이 가진 자부심, 사고 방식과 일하는 방법에 대한 접근도 흥미로웠다. 역사와 계보가 있다는 점도 좋았다. 나는 좀 그런 것에 목말랐던 것 같다. 또 하나, 매력을 느낀 부분. 디자인은 산업적 필요에 따라 어떤 이미지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사회에 필요한 어떤 기호를 기획해내는 일이고,메시지를 생산하는 일이다. 적어도, 그런 걸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 하다. 매력적이다.

일을 하면서, 조금씩 디자인 기초,철학을 배워보려 한다. 자주 글도 쓸 것.


디자인을 배우자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를 적어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