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 테스트

2023년 06월 10일

키보드를 샀다. 키보드 소리가 시끄러운데 아주 부드럽다. 키보드캡을 손가락이 오갈 때 자연스럽도록 각 키캡의 높이를 세심하게 조절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손가락에 착 감기는 키감이 아주 좋다. 존재감 있는 소리도 마음에 든다. 지금 치고 있는 이 문장은 그저 키보드의 소리를 듣고 싶어 쓰고 있을 뿐이다. 문장이 아닌 소리에 의미가 있다.

어떤 이유로 이걸 사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 홀린 듯이 돈을 썼다. 아마 이슬아 님의 타자기 교향곡 공연 영상을 본 것도 영향이 있었을까. 글을 쓰는 일이 사실은 이렇게나 소란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의 리듬을 만들고 즐기고 있다는 것. 그런 이미지에 홀렸던 것 같다.

요즘은 평온하고 허무하다. 몇 가지 일은 돈을 받고 한다. 일상에 잔잔하게 긴장이 생겼다. 돈을 받으면 책임을 다해야 하고, 결과를 내보여야 한다. 다른 사람을 실망시킬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기대감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압박감이나 두려움은 그 자체로 나쁜 말이 아니다.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듯이. 일을 하며 십여 년간 내가 알게 된 것들이 있구나 느낀다. 일의 장면을 조망하는 힘을 길러왔다.

잔잔한 긴장감은 내가 원했던 것이다. 허무함은 아주 깊이 있는 재미가 아니라는 점에서 온다. 사람들과 연결되고 확장되고 영속적으로 성장해나갈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저 그때그때 흩어질 무언가에 조금씩 에너지를 넣고 있다는 기분. 사실 그게 살아가며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기대치가 너무 높은 걸지도.

모임에서 J가 그런 질문을 했다. 여러분은 요즘 무슨 낙으로 사나요. 꽤 긴 시간 서로의 시작과 끝 그리고 애씀과 성취의 순간을 보아온 사이다. 각자 요즘은 또다른 국면에 접어들어서 서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주 고무된 상태도 아니고 아주 불안정한 상태도 아닌 그런 시기. 모임을 가기 전 내가 같이 읽고 싶어서 공유한 글은 어떤 소설집의 서문이었다. 작가는 다른 계절을 같은 마음으로 살 순 없다고 적었다. 나는 지금 내가 사는 계절이 어떤 모습인가 생각한다. 나는 아직 여름에 있지 않다. 스스로 여름의 에너지를 가지고 싶어서 마음만 바빠진 게 아닐까. 달각거리는 키보드 소리를 들으며 조도를 낮추고 어두운 방안에 앉아있으니 안정감이 든다. 지금은 내게 온 계절에 온전히 머무는 게 좋겠다.

힘은 억지로 내는 게 아니다. 힘들다라는 말은 힘을 들인 상태를 뜻한다. 나는 힘을 빼고 유영하고 싶다. 방향을 읽고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다. 키보드 충동구매에 아주 큰 뜻은 없었으나 어쩌면 무언가 대단한 걸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앉아서 이렇게 나 자신과 달각달각 대화를 나눌 시간이 필요하다는 신호 아니었나 싶다. 나는 나 자신의 쓸모를 구하고 싶지 않다. 내가 하는 일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지 않다. 한참 조바심이 난 이유가 거기 있었던 것 같다.

자는 중에도 눈썹을 찡그리고 있을 때가 있었다. 일 생각이 끝나지 않을 때.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건 사회에서 아주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태그와 붙어있다. 나는 결정이란 게 오지선다 문제의 정답을 고르듯 진행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결국 무언가 하나를 정해서 아주 끝장을 봐야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를 연소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게 내가 알아온 세상에 자리잡는 방식 아닌가) 생각하는 듯 하다. 경험에서 도출한 거짓에서 스스로 벗어날 필요가 있다.

키보드 타건감이 아주 좋다. 지금까지의 아까 테스트로 쳐볼 때는 이렇게까지 좋은 줄 몰랐는데 소리는 다소 시끄럽지만 작업방에서 혼자 이렇게 쓴다면 괜찮을 듯 하다. 스크리브너의 집중 모드를 켜놓고 한쪽에 타이머, 한쪽에 키보드, 한쪽에 책과 캘리그라피 펜을 두고 있으니 만족감이 차오른다. 나는 쓸모를 증명할 필요 없는 오롯한 혼자만의 공간에 머물고 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시끄럽게 굴 수 있는 공간에서. 내가 정한 시간 안에서.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형태로. 쓸모 있어서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라 내게 좋은 일을 하고 싶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 나는 책임지지 않는다. 나는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을 실망시킨다. 나는 기대를 저버린다. 나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나는 힘을 내지 않는다. 나는 힘을 들이지 않는다. 나는 목표를 만들지 않는다. 나는 그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다는 순진하고 유연한 마음에 기대어 나의 시간을 산다. 그게 지금의 내가 바라는 자유다.

경험에서 도출한 거짓에서 스스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끝.


키보드 사고 테스트해보며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