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아나토미는 칫솔이다

2024년 02월 04일

디자인학교 시각언어 실습 수업에서 받은 글쓰기 과제다. 콘텐츠에서 만다라트기법을 활용해 연관 키워드들을 뽑아냈다. 그리고 만들어 둔 시각적 형태소를 배치했다.

과제: 그레이 아나토미와 시각적 형태소의 연결
하위 주제: 성장 연관 키워드: 탐구 시도 용기 인정 실수 상실 넓어지다 확신과 의심


1 그레이 아나토미는 의학 드라마다. 이 드라마엔 엉망인 의사가 많이 나온다. 시애틀 그레이스 병원에서 진료 받는 환자들의 안위가 걱정될 정도.

인턴들 상태가 특히 심하다. 다른 의학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인턴이 피를 보고 기절해 수술실 바닥에 쿵 넘어지는 클리셰는 귀여운 수준이다. 이 드라마에서 한 인턴은 수술 중에 개복한 환자의 뱃속에 안경을 떨어뜨린다. 주인공인 그레이는 장기 이식 수술 중에 졸다가 라텍스 장갑에 구멍이 있는 걸 뒤늦게 발견한다. 구멍난 장갑 사이로는 손톱이 나와있고, 그 손에는 이식 중인 심장이 들려 있다. (이쯤되면 장르가 공포 아닌가.)

그 난리통 속에 병원에서 사랑도 하고 싸움도 하고,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고, 애도 태어나고 누군가 죽거나 떠나기도 한다. 환자들은 다종다양한 병으로 찾아온다. 총기 사고에 천재지변, 정치적 대립도 끊이지 않는다. 어떻게 그런 일이 다 일어나나 싶은데, 첫 방영이 2005년이었으니 이 모든 우여곡절이 마치 인생처럼 펼쳐질만 하다.

2 말그대로 '드라마'. 시즌 1에서 시즌 19까지, 어떤 시즌은 여러번 다시 보았다. 이 모든 ‘드라마'를 보고 또 본 나의 이유는 뭘까. 나는 그걸 보고 싶어한다. 엉망인 채로 어쨌건 나아가는 사람들.

환자 뱃속에 안경을 떨어뜨렸던 인턴은 고무밴드로 고정한 안경을 끼고 다시 수술실에 들어온다. 그레이는 환자에게 이식한 심장에 문제가 생긴 걸 알고 장갑의 구멍에 대해 징계위에 찾아가 고백한다. 인간적으로도 여러 결함을 가진 이 병원의 의사들은 그렇게 어찌 됐건 용기 내어 나아간다. 누군가를 상처주고도 다시 사랑을 한다. 중독에 빠졌다는 걸 인정하고 새로 시작한다. 의료사고로 자신의 남편이 죽고 나서도 의료 현장에 남는다.

3 아무것도 망치지 않고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의심 없이 가능한 확신이 있을까. 우리는 자주 그런 불가능을 바란다. 망신을 당하고, 깨지고, 틀리는 건 아픈 일이기 때문에.

주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멋이 없다고들 하니까. 단번에 선을 그어 나아가고 싶다. 시작점에서 도착점까지 이미 한 번 선을 그어 본 사람처럼.

그러나 이런 욕망은 우리가 언제나 삐끗할 수밖에 없는 존재란 사실을 반증한다. 이건 내가 성장에 관해 아는 유일한 사실이다. 나아가고 싶은가? 방법은 하나 뿐이다. 여러번 삐끗하라. 삐끗하며 사방으로 틀린 선을 그어라. 때로 끊어진 것처럼 보여도, 모두 다 다른 방향인 듯 보여도 괜찮다.

형상은 시간이 만들어줄 것이다.

아무것도 망치지 않고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의심 없이 가능한 확신이 있을까. 우리는 자주 그런 불가능을 바란다.

끝.


디자인학교 과제로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