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어른을 키우는 이야기

2023년 03월 04일

그레이 아나토미 때문에 결국 또 하나의 월간 결제를 늘렸다. 디즈니 플러스. 시즌 19가 나왔고, 어쩔 수 없었다. 그레이의 임종을 보고야 이 의리가 끝날 것이다. 나는 온라인 조의금도 낼 준비가 되어있다.

그레이는 임시 외과장이 되었다. 이제 이게 몇 번째일까? 하여튼 다시 외과장이 되었다. 시즌19까지 드라마가 진행 되는 동안 그녀는 남편을 잃고, 여동생을 잃고, 친구들을 떠나보내고, 미국의 보험 제도에 맞서 인류애를 지키려다가 의사 면허를 잃을 뻔했고, 코로나로 코마에 빠졌다가 Finally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황천길의 강을 다리 사이에 두고 고무줄놀이를 하는 사람처럼 여러번 죽다 살아난다. (다른 의학 드라마 의사들이랑 다르게 시애틀 그레이스의 의사들과 그레이는 항상 직접 환자가 된다…)  나는 그레이가 매번 살아날 것을 믿으며 드라마를 본다. 살아나서 더 강해지고, 결국에는 결말을 내러 돌아올 것임을. 그건 그녀와 나 사이의 의리다.

미국판 전원일기가 겪어온 변화

시즌 19는 어른이 어른을 키우는 이야기다. 그레이의 성장을 지켜봐온 독자들은 십수년의 세월을 함께 드라마 안에서 겪어왔다. 잠깐 짚고 넘어가면 그레이 아나토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병원에서 섹스하는 이야기인 줄로만 안다. 때로 나도 설명하기가 좀 귀찮을 때 - 초기 시즌까지 볼 때는 - 병원에서 섹스하는 이야기라고 설명해주곤 했다. 시즌 1에서는 실제로 드라마 사이에 들어가는 인트로 영상에 빨간 구두가, 벗은 몸이 병실 침대 위아래로 보인다.

그건 옛날 일이다. 병원에서 섹스하는 의사들을 보는 건 흥미롭지만 그건 그냥 병원에서 살아가느라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나오는 섹스는 이제 로맨스, 에로스에 관한 장면이 아니라 노동 후 샤워 장면에 가깝다. 와닿도록 이야기해보자면 그레이 아나토미의 방영 기간이 18년 (2005년 3월 27일 ~ 현재)이고, 전원일기 방영 기간이22년(1980년 10월 21일~2002년 12월 29일)이다. 미국판 전원일기랄까. 이 안에 생로병사, 관혼상제가 다 있다. 그레이 아나토미 안에서 이야기 되는 것은 ‘인생’ 그 자체다.

이 드라마는 변하고 있다. 특히 지난 시즌부터는 좀 더 미국의 사회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코로나로 일어난 의료 시스템의 붕괴부터 시작해서 전쟁과 난민, 이주민, 보험 때문에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까지. 아마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 드라마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변화가 반영되지 않았을까. 뭔가 하면서 긴 세월을 보내면, 내가 일을 하는 건지 그 일이 나를 만드는 건지 그 경계가 흐려진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이야기라면 더 그럴만 하겠지? 이 드라마를 하면서 드라마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 드라마를 만들면 살아온 사람들도 어떤 변화를 겪은 듯하다. 매주 의료 사고 케이스를 찾아야 하는 드라마 작가가 저명한 윤리학자보다 더 윤리적 딜레마를 잘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둘이 맞대 보면 분명히 전자가 가진 이야기가 더 많을 것이다. 나는 분명하게 전자에 건다.

어른이 어른을 키우는 이야기

그레이 아나토미는 더 이상 그레이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즌 19에 들어서서는 더 분명하게. 그레이 아나토미의 1세대(크리스나 양,데릭 셰퍼드,이지 스티븐스,조지 오말리 등등), 2세대(에이프릴,렉시, 마크 슬론,캘리 토레스 등등)가 가고 3세대는 건너뛰고 이제 한 4세대쯤 왔나. 남아있는 사람들은 이제 ‘키우는 사람들'이 됐다. 이건 이제 어른들이 어른을 키우는 이야기다.

새로 등장한 인턴들은 그레이의 ‘라떼'와 비슷하게 욕심쟁이고 오만하고 사고를 치고 다닌다. 이전에는 뭔지 모르는 세계에 적응해가는 인턴의 시점(그레이 젊은 시절)이 주였다면, 이제는 그 인턴을 키우는 사람들의 시점에 더 공감이 간다. 키우는 사람들이 이미 겪어본 사람들이란 걸 시청자들이 알기 때문이다.

한 인턴의 할머니가 병원에 찾아와서 그녀를 찾는다. 치매에 걸린 그녀는 손녀딸을 20년 전 죽은 자기 딸로 착각하고 있다. 당황한 인턴과 사실을 듣고 패닉 직전인 할머니 사이에서 그레이가 대처한다. “우리 어머니-전설적인 외과의였던 또다른 그레이-도 알츠하이머병에 걸리셨었어. 수술실에 들어가겠다고 난리셨지.” 병원 밖 의자에 앉아 그런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를 도우라는 베일리의 말

그레이 아나토미의 또 다른 종신직(?)인 의사 베일리도 삶에 노련해졌다. 청소년기 첫째 아들과 입양한 둘째 어린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그녀는 병원에서 할로윈 분장을 하고 아이와 놀고 있다. 그때 대기실에서 싸우고 있는 보호자들을 본다. 파티 중에 마약을 하고 지붕에서 뛰어내린 두 소년의 아빠들이다. 그들은 순진한 내 아들이 네 꼬임 때문에 다쳤다며 핏대를 올리고 싸운다. 베일리는 뛰어들어 어른들을 정신 차리게 한다.

HEY HEY 이보세요. 저는 의사 미란다 베일리입니다. 지금 꼴이 이렇긴 해도 이 병원 의사고요. 그리고 엄마이기도 해요. 두 분, 양육이 어려운 건 알아요. 십대는 종잡을 수 없는데 그런 애들을 키우는 건… 분명 한때는 저렇게 할로윈 코스튬하고 놀던 꼬마였고 어느 정도 고분고분했는데 정신 차려보면 핸드폰만 보고 충동적이고 절대 못 하게 기를 쓰고 막았던 일들을 다 하고 있죠.

제 아들은 지난주에 핸드폰만 보고 있길래 제가 결국 빼앗아 버렸죠. 그랬더니 아들이 그러는 거예요. 요샌 마약 딜러들이 애들에게 약물 구매처를 알리는 이모티콘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두 분, 누구 잘못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 애들이 살아있다는 게 중요할 뿐이에요. 이런 식으로 서로 배척해선 안 돼요. (We cannot turn on each other) 우리는 지금 배척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해요.”

이렇게 정확하게 공감과 설득, 교훈을 담아서 어른에게 어른일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나? 요즘의 그레이 아나토미는 어른들을 교육하는 드라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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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19를 시작하며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