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쏟아진 저 피를 좀 봐요

2023년 03월 05일

사회적 합의가 뒤집어진 후

동시대에 가장 많이 죽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몸으로 느끼는 사람은 의사들이다. 현장에서 응급하게 목숨을 구하다보면 의사들은 어쩔 수 없이 망가진 구조 속 동조자가 되든 액티비스트가 되든 하나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의학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19의 5화는 미국의 낙태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로대 웨이드 관련 대법원 판결 - 여성의 선택권을 뒷받침했던 가장 큰 사회적 합의가 뒤집어진 뒤, 병원에서 마주하는 일에 대한 에피소드다.

여성의 재생산권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판결이 뒤집어지기 이전부터 미국에는 계속 정치적 변화의 조짐이 있었다. 텍사스 주는 이미 임신 중단을 가장 강력하게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여성은 임신 6주 이후 임신중단을 하면 살인죄로 기소될 수도 있다. 성범죄나 근친상간의 경우까지 임신 중단을 불법으로 지정하고, 파파라치 신고제도까지 만들어 서로 고발하게 했다. 법이 시행 되기 하루 전 날, 클리닉에는 117명의 여성이 줄을 섰다. 밤 11시 56분까지 진료가 계속 되었다. (뉴닉 기사 참고)

이제 이런 종류의 악몽을 수많은 주의 미국 여성들은 겪고 있다. 대법원 판결은 미국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가이드’다. 22년 7월, 로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혔다. 대법원에서 여성의 선택권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난 판결이 로대웨이드 판결이었고, 그게 뒤집히면서 이제 ‘미국 전역 공통의 규범'의 방향이 바뀌었다. 판결이 뒤집힌 당시에는 미국 절반의 주에서 낙태 금지 조치를 시행할 거라는 예측이 있었다. 이제 개별 주에서 알아서 정치적 싸움이 시작된다. 다시 지난한 권리의 싸움을 반복해야 한다.

저 먼 미국의 판결이 왜 중요할까 싶겠지만 여성의 권리에 대한 논의는 전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건 단순히 법의 싸움이 아니라 윤리의 싸움이고, 당위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가를 고민할 때 한 사회는 다른 사회를 참조점 삼기도 한다.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명은 소중하다-라고 외치는 말은 나에게는 물은 살아있다-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라임이 맞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 말이 간과하는 생명에 대한 생각을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쉽게 결정한다고? 임신중단은 쇼핑이 아니다. 여성이 자기 몸을 걸고 하는 결정이고, 자기 삶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결정이다.

닥터 몽고메리의 초조함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안에서 이 이야기는 인턴들이 성교육을 하는 화에서부터 시작한다. 로대웨이드 판결 번복 이후 산부인과 닥터 몽고메리는 ‘무엇이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당장 십대들의 임신부터가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택한 게 성교육이다. 이 일을 인턴들에게 시키는데 처음엔 대충 하다가 나중에는 곧잘 한다. 클리토리스를 불날 듯이 문지르지 말 것. 성냥이 아님. 클리도 발기함. 콘돔 2겹 끼지 말기. 이래저래. 유쾌하게 성교육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 교실을 뛰쳐나오는 한 십대 여성이 있다. 비상구 계단에서 닥터 몽고메리와 만난 그녀는 ‘임신한 것 같다'고 말한다. 몽고메리는 침착하게 유산유도제를 처방하고 그녀 곁에 있는다. 이 화에는 모든 것들 아래에는 결국 뭐든 해야겠는데 뭘 해야될지 모르겠는 의사의 초조함이 담긴다. 이 불안, 불만, 절규는 5화에서 폭발한다.

5화에서는 너무나 전형적인 사각지대로 들어간다. 아이다호에 있는 산모가 위험하다. 시애틀의 의사들이 출장을 간다. 산모는 제왕절개반흔에 아이가 착상한 자궁벽내임신이다. 임신을 유지하면 산모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아이다호 병원은 진료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기소 되기 싫어서. 이 태아의 유산을 도우면 의료진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태아 심장이 뛰고 있기 때문이다. 일명 ‘심장박동법'으로 태아 심장박동을 상징으로 삼은 보수 진영의 선전이 미국에서 로대웨이드 판결이 뒤집히는데 한 역할을 했다. ‘심장이 뛰는데 사람이 아냐?’ 이게 모두의 죄책감을 건드린 것이다. 참고로 비슷한 프레임이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헝가리에서는 22년 '낙태 전 태아 심박음 청취 의무화' 시행령이 생겼다.

닥터 베일리,몽고메리는 수송 차량에서 39세 여성을 만난다. 주차장에서 그녀를 픽업해 오는데 그녀는 바쁘다. 5살 딸이 있다. 동생인 뱃속 아기를 ‘선디(선데 아이스크림)’'라고 부른다. 딸이 실로 만든 팔찌가 어찌나 많은지 미시시피주 전역에 뿌려도 될 정도라고 농담한다. 수송 차량 앞좌석에 탄 두 의사에게도 팔에 팔찌를 채워준다. 이후에 임신할 순 있겠죠? 그렇게 그녀가 묻는 순간 나는 직감한다. She is destined to death.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개인의 히스토리를 줄줄 알아서 늘어놓는 사람은 죽는다. 그건 공포영화에서 호기심 많은 사람이 먼저 죽는 것과 비슷한 원리. 자기 사연을 늘어놓는 넉살 좋은 사람은 의학 드라마에서 가장 먼저 죽는다.

Take a look at all the blood

우리 인생에 교훈을 주려는 걸까? 사회적 표본이 되는 죽음. 그런 이야기는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자기 이야기를 먼저 늘어놓는 사람이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면 좀 비참하고 힘들다. 도로에서 그녀는 5살 딸의 당근 케잌을 구워줘야 한다고, 그녀의 졸업파티를 가고 싶다고, 사랑에 빠지는 걸 보고 싶다고 말하다 죽는다. 제발 죽지마. 그냥 살려 줘라. 숀다 라임스 이 양반아. 좀 살려줘. 닥터 몽고메리가 하는 심폐소생술을 보며 나는 힘들어한다.

표본은 어디에나 있다. 폴란드에서 시위가 일어난 이유는 이자벨라라는 여성의 사망 때문이다. 2021년, 그녀는 임신 22주 상태에서 양수가 터져 병원을 찾았으나 제때에 수술을 받지 못해 패혈 쇼크로 숨졌다. 의사들은 태아의 심장이 멈출 때까지 수술을 미뤘고 그게 패혈 쇼크로 이어졌다. 폴란드는 엄격하게 임신 중지를 법으로 제한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어났던 ‘검은시위'는 폴란드의 영향을 받았다. 폴란드에서 여성들은 검은 옷을 입고 옷걸이를 들고 나왔다. 모든 임신중지가 불법이 되자 옷걸이로 낙태를 하다가 숨져간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외치기 위해서다.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언덕에서 굴렀다거나, 간장을 마셨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전해내려온다.

다시 돌아와서. 도로에 죽은 39세 여성 환자가 누워있다. 울화통이 터져서 소리지르는 닥터 몽고 메리. Take a look at all the blood. 법을 만든 사람들은 이걸 알기나 하냐며 운다. 울화통이 터진다. 의사로서 사람을 도우라고 배우고도 결국 손이 묶여있다. our hands are tied. 뭐라도 꼭 해야 한다고 그는 울다가 병원에 돌아와 이야기한다. 지도라도 펼쳐 봐야겠어요. 닥터 베일리는 이야기한다.

일리노이 남부는 어때요? 나도 똑같은 생각으로 지도를 펼쳐 봤었거든요.

일리노이 남부는 미주리, 야칸소, 네테시, 미시시피의 사이의 사이에 낀 곳. 1만 4천 명의 여성들이 임신 중단을 하기 위해 몰려든다고 한다. 그 섬으로 가라는 것이다. 임신 중단이 아직 합법인 곳.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 것이다.

닥터 미란다 베일리는 엄마이고, 크리스쳔이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쳔으로 이 드라마에서 자주 기도하며 등장한다. 그는 한번도 선택으로 유산을 유도할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아이가 배안에서 유산되고 어쩔 수 없이 그를 자궁에서 긁어낸 경험이 있다. 그 시술의 과정은 여성의 선택으로 이뤄지는 유산과 정확히 똑같다. 그러나 임신중지가 ‘윤리'의 영역에 갇히면서 의사들은 이 시술을 배우기를, 병원은 이 시술을 가르치기를 꺼리고 있다. 미란다는 이 시술을 교육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시애틀 그레이스에 그 교육 프로그램을 제안하겠다고 다짐한다.

섬으로 가는 여자들

욕 먹는 건 중요하지 않다. 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해보지 않으면 또다시 그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닥터 베일리, 몽고메리는 그 도로 위에서 다시 사망 선고를 해야한다. 그래서 뭐든간에 하려는 것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생명과 비생명의 윤리에 갇혀서 잘못된 판단을 제도화하고 나면, 언제나 세상에는 섬이 생긴다. 어떻게든 그 섬으로 가닿는 방법을 찾으려는 여자들이 또 있다. 레베카 곰퍼츠는 네덜란드 산부인과 의사로 약물 낙태가 불법이라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약물을 전하기 위해 네덜란드에서 배를 띄웠다. 그리고 비영리단체 위민온웹을 만들었다. 그 사이트에 방문하는 한국 여성들이 많고, 방통위는 계속 접속을 차단하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접속차단을 풀라고 시위를 했다.

우먼온웹 (Women on Web)은 여성을 포함하여 임신한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게 임신중단할 권리 보장을 위한 비영리 단체

한국은 낙태죄가 폐지 되었지만 입법 공백으로 아직도 약물 임신중단을 가이드할 기준이 없다. 임신 중단은 여전히 아무 가이드 없이 이뤄진다. 언론에서는 이게 무법지대에 놓여있다며 공포화한다. 과학으로 발명한 것 중 사람을 살릴 수 있고, 비침습적 처치로 살릴 수 있으며, 권리를 보장하고, 평생을 바꿀 수 있는 자기 인생의 결정을 도울 수 있는 기술을 안 쓰는 영역은 재생산권의 영역 뿐이다.

한쪽에선 이건 ‘생명이 달린 이야기'라고 소리치지만 반대편에서도 결국 할 얘기는 ‘이건 생명이 달린 이야기'라는 것 뿐이다. 도로에 누워있는 39세 여성의 시체는 결국 그 이야기를 상징한다.

‘이것은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다'라는 피켓을 사람들이 들 때, 우리는 말해야 한다. 맞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이야기다. 임신 중단에 대한 논의는 쉬운 주제는 아니다. 복잡해야 더 나은 논의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 어렵게 고민해야 한다.

당신이 살리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는 그 결정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Take a look at all the blood.”

끝.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19에 4,5화를 보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