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과 목적 없는 대화

2023년 03월 19일

오늘로 초록집에서의 한 주가 끝났다. 작업실이라고 부를 만한 곳으로 외출하는 감각이 신선했다. 모르는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것도 오랜만이라. 사회적 감각을 깨우는 국민체조 같은 걸 한 느낌이랄까. 낯선 사람과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대화의 시간을 많이 가진 한 주였다.

집에서도 ‘작업'이랄 것을 할 만한 환경은 올 초부터 만들어두었다.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허리 건강을 책임질 시디즈 의자도 큰 지출을 감수하고 구매했다. 그러나 혼자 앉아서 하는 혼잣말 같은 작업 시간이 길어지니 뭐랄까 생활감이 떨어진달까. 낯선 것에 노출되고 싶은 마음이 넘실넘실 느껴지기에 외출을 계획했다. 퇴계 님의 시의적절하고 사려 깊은 초대 덕분이기도 하다.

초록집은 미학적으로 아름다워서 좋았다. 이름에 걸맞게 초록이 가득하다. 식물들 사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포켓몬 중 식물 계열인 치코리타 같기도 하고, 평화롭고 좋아보인다. 문을 여닫는 시간대가 따로 없어서 각자 원하는 시간에 공간 속에 흐르고 마주치며 일한다는 것도 흥미롭다. 적당한 거리감도 안정적이었다.

어차피 성수까지 외출을 하는 거, 사람들을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자 싶었다. 인생에서 목적 없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의 비중을 좀 더 늘리고 싶었던 참이었다. 인스타그램에 소식을 전했더니 만나보자고 선뜻 시간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5일 동안 일곱 타임 정도 사람들을 만나서 빵도 먹고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알던 사람도 있고, 이 기회로 새롭게 만난 사람도 있다.

목적을 가진 대화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인터뷰'다. M과 몇 번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는 판을 깔면서, 나는 아주 신이 났다. 우리는 친구로 만나 대화한 시간도 길었지만, 이렇게 판을 깔아야만 생기는 대화란 게 존재한다. 구석구석 묻고, 주의를 한껏 집중하고 배경을 조사해서 대화하는 일의 쾌감도 있다. 대충 묻고 가지 않고, 독자라는 신을 등에 업어서 더 멍청한 질문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넘기 힘든 선도 한 번 더 넘어볼 수 있다.

대화라는 게 다 다르겠으나, 나에게 가장 드물고 희귀한 일은 모르는 사람과 목적 없이 대화하는 일이다. 오히려 아는 사람과 목적을 가지고 대화하거나, 처음 보는 사람과 목적 있는 대화를 하는 게 더 익숙하다. 인터뷰, 발표, 강연에서의 질문과 답변. 이런 건 목적이 있는 대화다. 나는 목적 있는 대화를 경로 안에서 잘 운전할 줄 안다. 그 과정 중에 있을 때, 자신의 능숙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불만족하지 않을 만큼은 잘한다는 뜻이고, 데이터가 있다는 뜻이다. 많이 해봤으니까.

목적 없는 대화는 어떨까. 낯선 사람과 어떤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을까. 아무 정보 없이 만난 사람과 적어도 한 시간 흥미로운 대화를 지속할 수 있을까. 그런 게 궁금하기도 했는데, 티타임 시간이 다 즐거웠다. 대화에 있어서 새로운 감각이 뜨이는 기분이라 좀 더 즐기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 매일 낯선 사람과 만났는데 그 대화 안에서의 발견이나 질문이 내 안에서는 연속성을 가지고 이어지는 것도 즐거웠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돈과 일에 대한 이야기라는 같은 땀으로 꿰어졌고, 넷째 날은 일상을 회복하는 기간에 대한 이야기로 그 전날 저녁에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와 붙었다. 우연한 만남과 질문,답변 속에서 내 안에서는 어떤 기류가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목적도 사전 정보도 없는 대화 안에서 긴장 없이 온전히 집중했다. 상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내 마음에 떠오르는 질문을 던져서 이야기의 경로를 꺾어보기도 하고, 상대의 질문을 받고 닫아 두었던 어떤 이야기의 서랍이 덜컥 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신기한 일이다. 때로 사람들은 낯선 사람 앞에서 자신을 설명하는 일을 통해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더 선명하게 인식한다. 자기 서사를 그렇게까지 말해볼 일이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다니.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과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의도치 않은 곳까지 여행할 능력을 얻는다. 대화엔 공간이 있고, 역동이 있다. 우리를 흔들고 밀며 멀리 보내는 힘. 목적이 없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그대로 들었는지 모른다. 때로 머릿속에서 대화를 계속 편집하거나 의도를 골라내며 듣기도 한다. 그런 정신노동 없이 처음 듣는 휘파람 듣듯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시원했다.

낯선 사람과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의도치 않은 곳까지 여행할 능력을 얻는다.

끝.


초록집 마지막 날 집에 와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