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술자의 동기 해제

2023년 01월 01일

올가 토카 루츠크는 책 ‘다정한 서술자'에서 다양한 집필 동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중 하나로 그는 조지 오웰이 말하는 서술 동기에 대해 그가 이해한 바를 옮긴다.

우리는 평정심을 찾기 위해, 아니면 잃어버렸거나 흔들리는 질서의 의미를 세상에 복원시키기 위해 언어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균형을 찾고 싶어하고, 언어는 균형을 찾는 수단이다. 글로 옮기면 경험은 나로부터 떨어져나간다. 혼란스럽다고 쓰면 혼란이 나에게서 종이로 옮겨간다. 쓰는 사람은 해방 되는 기쁨을 누린다. 엄마에 대해 쓰면 엄마를 아무개의 캐릭터로 바라보게 된다. 써둔 글을 묵혀뒀다 읽으면 ‘아, 이런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군’ 하고 깨닫게 된다. 나를 벗어나 유체이탈한 영혼이 천장에서 인물들을 내려다보듯 자기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야가 생긴다.

글쓰기는 이해할 수 없던 한 사람을 입체적으로 일으켜 세우는 방편이다. 글을 쓰면 고민하게 된다.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전후에 어떤 일이 있었나. 관계를 바라보는 힘이 생긴다. 나의 시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점을 세밀하게 더하면서 나는 둘만의 상황에서 해방된다. 엄마는 수많은 엄마들로 확장되고, 나는 수많은 딸들로 넓어진다. 나는 우리와 비슷한 모든 여자들의 존재를 추정하면서 위로를 받는다. 나는 내 안에 갇혀있기를 포기하고 완전한 내 편이기를 포기한다. 그저 주저 앉아 오랫동안 바라보게 된다. 당신의 삶의 맥락을 엮고, 우리 사이에 있는 세상의 맥락을 엮어보는 실뜨기를 한다.

글을 쓰면서 나는 ‘그때’의 내 편이 되어주고 싶다. 상담실에서, 친구들에게서 자주 들었던 조언이 있다. “자신의 편을 좀 더 들어보면 어떨까요?/ 그래서 그 때 네 마음은 어땠어?”나는 과거에 내버려두고 온 나의 마음을 줍기 위해 길을 되돌아간다. 내 편이 되어 나를 도닥거리고, 같이 욕해주는 언니가 된다.

글을 쓰면서 나는 ‘그때’의 엄마를 이해해보고 싶다. 과도하게 이해하고, 한편으론 내 엄마가 아닌 ‘이 엄마’란 인물을 재밌어하면서 뜯어보고 싶다. 혼자 있던 당신의 마음은 어땠을지, 무엇이 두려웠을지, 무엇이 좋았을지 생각해보려 한다. 스치듯이 해줬던 말, 사진들, 내 어린시절의 기억들을 뜯어 보면서.

어릴 적 기억은 흐릿하다. 그 사실이 좋은 빌미가 되어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원망하고 싶어서 과도하게 이야기를 지어낼 지도 모른다. 혹은 이해하고, 연민하고 싶은 나머지 무언가를 생략할 지도 모른다. 나는 신뢰할 만한 서술자가 되기를 포기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결국 이건 누군가의 편에 서는 이야기가 아니다. 스스로를 편들다가 또 편들기를 계속해서 포기하게 만드는 일이다. 자기 학대의 고급진 기술일지도 몰라. 나는 그런 정확한 고통을 좋아한다.

나는 내 안에 갇혀있기를 포기하고 완전한 내 편이기를 포기한다. 그저 주저 앉아 오랫동안 바라보게 된다.

끝.

엄마에 관한 자전적 소설을 써보기로 결심한 후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