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읽기

2023년 03월 05일

하마 글방에서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연속해 읽었다. 빈 옷장,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를 '삶을 쓰는 작가'라고 사람들은 평한다. 자전적 소설을 주로 썼다. 지나온 자리를 글로 남기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처럼 솔직하고 적나라한 글쓰기를 해왔다. ‘살아서 건너오는 글’. 아니 에르노의 작품 셋을 읽었는데, 모두 어떤 경험을 통과하며 ‘지나치게' 적은 글들이다. 뭐라고 정리해서 말하기가 어렵네…

다들 그렇게 산다. 모른 척하고, 못 본 척하고, 굳이 들여다보지 않는 감정들이 있다고. '나에게 오는 것 중에 내가 싫어서 그것들이 아예 안 온 척 하는 순간들.' 불쾌해서. 싫어서. 알아도 어쩔 도리가 없어서. 부끄러워서. 스킵하는 감정들이 있다.

아니 에르노는 ‘사람들이 안 온 척 하는 순간들’을 통째로 쓴다. 요양원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어머니에 대해 드는 가학적인 마음. 불륜 상대에게 느끼는 단순하고 지극한 열정. 스무 살, 임신 중지 시술을 받기 위해 산파를 기다리며 스치는 분노, 구역질, 수치심.

자기를 통과해가는 모든 것에 대해 극심한 기록의 충동을 느끼는 인류학자 같다. 사명에 가까운 충동. 이런 충동은 어디서 왔을까. 독서 모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첫 작품 ‘빈 옷장’을 떠올렸다. 그가 언어를 배우면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건너온 경험을 읽어볼 수 있다. 언어의 계급성. 내가 싫어하는 것이 나를 구성함.  나를 설명하지 않는 말들에 둘러싸임. 그런 것들.

문학, 그것조차도 빈곤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상이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전적인 방법.

아니 에르노, 빈 옷장

그는 식료품점 딸로 '솔직하고 천박한' 생활의 세계에서 컸다. 그는 고등 학문을 배우면서 언어를 배우고 학문의 세계로, 고상한 지식인들의 틈으로 탈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곳은 그곳대로 위선으로 가득하고 모든 것이 너무 정제된 세계. 자신이 모욕당하는 세계. 이질적인 세계. 아니 에르노는 진실한 것을 찾았다.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에서 말하지 않아질 것, 이야기 되지 않을 것들을 번역해내기. 책이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말할 의무. 그게 그녀의 글쓰기의 충동이 일어나는 곳 아닐까. 그는 말에 존재를 기대는 사람 같다. 말하지 않으면 투명해져 사라져버릴 위기에 놓인 사람 같다.

빅토르 위고나 페기처럼 교과 과정에 있는 작가를 공부해 볼까. 구역질이 난다. 그 안에는 나를 위한 것, 내 상황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묘사하거나 이 끔찍한 순간이 지나가게끔 도와주는 대목은 한 구절도 없다. 탄생, 결혼, 임종, 모든 상황마다 그에 따른 기도가 존재하지 않는가, 모든 상황에 맞는 구절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낙태 전문 산파의 집에 갔다가 나온 스무 살의 여자아이를 위한, 그 여자아이가 걸으면서, 침대 위에 몸을 던지면서 생각하는 것에 관해 쓴 구절. 그렇다면 나는 읽고 또 읽을 것이다. 책은 그런 일에 대해 침묵한다.

아니 에르노, 빈 옷장

초기작 ‘빈 옷장’의 독서 경험이 가장 극적이었다. 처음에는 읽기를 포기하고 싶었고, 나중에는 다시금 읽고 싶었다.

‘빈 옷장’에서의 아니 에르노의 글은 매끄럽지 않고 문장들 곳곳이 깨져있다. 각각의 문장이라기보다는 감각이고, 흩뿌려진 문장이 감각의 점이 되고, 그 점으로 가득한 공간 속에 서 있는 기분이 된다. 작가는 그렇게 써야만 표현될 수 있으니 그렇게 썼을 것이다.

처음에 읽기를 포기 하고 싶었던 이유는, 글이 ‘읽히질’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는 특히 가독성이 좋지 않았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았는데, 내가 꽤 오랫동안 정돈된 말, 전달하는 말, 깎아낸 말들을 읽고 써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이해하고 넘어가는 독서가 아니라 와닿는 감각을 느끼고 넘어가는 독서도 있구나. 몸으로 읽는 글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무엇을 읽었고 무엇을 써왔는지를 다시 돌아본다.

사람들과 감상을 나누면서 나는 ‘아부해왔다'는 기분에 대해 말했다. 설득하는 유능함을 장착하기 위해 노력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때로 그게 바깥 세상에 대해 아부하고 자신의 진실을 왜곡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고. 정돈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정돈해서 말해야만 하는 - 듣도록 호소해야 하는 상황들에 아주 잘 순응하면서 훈련되어 온 것 같다고.

그 말을 알아들은 사람들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전적 소설에 대한 윤리적 고민

자전적 소설, 오토 픽션이란 장르에 대한 의문. 그 의문은 자전적 소설을 쓰는 사람은 어떤 윤리를 가지고 글을 써야 하나. 절연 당한 작가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누군가와의 현실 대화를 인용했다가 고발당한 작가도 생각이 나고.

글방에선 관찰해서 한 이야기는 결국 관찰자 자신의 진실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고, 더불어 진실은 결국 사람들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곳에 있을 수 있으므로 무언가 드러내는 건 작가의 사명이란 이야기도. 글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 가장 설득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한가지 규칙으로 판단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글방에선 서로 읽고 평하는 경험처럼 '윤리적 훈련'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나눴다. 어떻게 쓸지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결국 적극적으로 읽어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노출되고 바깥의 이야기와 섞여야 한다.

사람들과 감상을 나누면서 나는 ‘아부해왔다'는 기분에 대해 말했다. 설득하는 유능함을 장착하기 위해 노력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때로 그게 바깥 세상에 대해 아부하고 자신의 진실을 왜곡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고.

끝.

하마 글방에서 아니 에르노의 빈옷장,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단순한 열정을 읽고 쓴 감상들을 합쳐서 정리했다.